통인blues

누군가에게는 추억, 누군가에게는 경력, 누군가에게는 현재

오늘은 6월 10일이다.
7-80년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이 날짜의 비중은 결코 365분의 1 정도일 수 없을 것이다. 숨쉬는 것조차 힘겹던 군부독재 시절이 있었고 최류탄 지랄탄보다 더 쓰렸던 죽음들이 있었고 그 피를 먹고 겨우 움튼 민주주의를 쟁취한 시절. 그 시절을 우리는 '6월10일'이란 숫자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오늘은 87년 이후 꼭 20년이 되는 특별한 6월 10일이다.
20년이면, 세상은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 올해 6.10 기념 행사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기념식을 정부가 직접 주도하고, 대통령이 연사가 될 정도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대선후보들에 대한 평가잣대 중 하나로, '87년에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을 정도로 민주화운동은 '언더'에서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와 있다. 이 역시 민주화운동의 성과이자, 역사의 발전이다. 그러나 '당연'하기까지 한 이런 변화를 보고 있는 내 마음은 그닥 편치 못하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도 없다. 87년 이후 20년, 우리는 힘겹게 얻어낸 절차적 민주주의의 터널을 지나, 어떤 사회에 와 있나.
지난 주 mbc에서 87년 6월항쟁 기념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87년 2월, 학생운동 중 다가올 공권력의 공포에 결국 스스로 목을 메고 자살한 박선영과 그의 가족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서울로 대학 간 꽃보다 귀한 딸, 21살 박선영의 차가운 시신 앞에서, 어머니는 맹세한다. 딸의 손과 자신의 손을 맞추고, 딸의 차가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비며 차가운 딸과 어머니는 대화한다. '너는 살고 내가 죽었다'고. 그리고 어머니는 '박선영'으로 살기 시작한다. 딸이 되어 데모를 하고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며 전경과 싸우고 외치고 또 외치며, 그렇게 '박선영'으로 지난 20년을 사셨다. 다큐멘터리 중 마지막 현장은 한미FTA 반대 농성장이다. 참여연대가 담당했던 세종문화회관 앞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당시 분신 후 사경을 헤매던 허세욱 선생님 소식에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다큐멘터리 중, 가장 슬펐던 부분은 대학 캠퍼스에서 스무살 대학생들을 보며 혼잣말을 하시던 모습이다. "우리 선영이도 당신들처럼 아름다운 청춘이 있었어. 선영이도 그 청춘이 소중했는데. 그런데 민주주의가 더 소중해서, 목숨을 바쳤어. 나는 선영이가 보고 싶어 죽겠네, 우리 선영이가 보고 싶어 죽겠네."
2007년의 '6월항쟁'은 누군가에게는 추억이자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정치적으로 활용할 경력이다. 그리고 박선영의 어머니처럼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오늘도 싸워야 할 '현재'이다. 나는 어디쯤일까?  
87년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관이 주관하는 행사 말고 '6월항쟁'의 현재적 의미를 함께 느껴볼 시민/회원행사를 마련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무엇이 있을까? 일상에 지친 나는, 사진이나 다큐 등의 사료로 접근하거나 토론회 정도 외에 별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근 상황에 대한 정치적 염증으로 '민주주의는 지겹다'는 정서를 극복할 기획이 없었다. 그저그런 구태의연한 행사에 그치고 말것 같아, 그만두자고 했다. 지난 월요일 다친 발 때문에, 오늘 시민사회진영에서 마련한 거리 행사에 나가지도 못한채 공중파에서 떠들어대는 '20주년 기념' 프로그램이나 보고 있자니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20년이 지났지만, 사회는 여전히 답답하고, 시민운동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명확한 해답이 없고, 나 스스로도 앞이 안보인다. 그러다가 홍성태 선생님이 보내주신 칼 끝 단락마음이 풀리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민주화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영속적 과정이며, 시대의 변화는 언제나 또 다른 과제를 낳는다."
20년이 끝은 아니다. 과정 중 일부일 뿐이다. 87년이라는 거대한 분수령 뒤에, 진보운동이 대단한 무엇인가를 내놓지 못했다고 반성은 할 수 있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2007년 6월에도,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에 목마르지 않은가. 시민항쟁이 쟁취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새롭게 드러난 사회적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20년 전 선배들이 최선을 다했듯 오늘 우리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에게 그 일부인 참여연대에게 87년 6월항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에 속한 나에게도, 우리를 지지하며 함께 달리는 시민과 회원들에게도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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