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당신 친구분 말인데요. 그 여자분도 이름이 있겠지요?”
“지금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어떻게 약속이 되어 있습니까?”
그는 연한 빛깔의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오늘 오후에서야 나한테 전화를 했는지. 왜 나를 선택한거죠? 누가 나에 대해서 말해준 겁니까?”
그는 웃었다. 소년 같은 웃음이었지만 아주 어린 소년 같지는 않았다.
“글쎄 사실 고백하자면 전화번호부에서 무작위로 골라냈습니다. 원래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아시죠. 그러다 오늘 오후에야 그래서 안 될 이유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멋진 마무리군. 그들은 내 총을 남겨두었다. 뭐가 되었건 멋진 마무리야. 칼로 찔러 죽인 뒤에 눈을 감겨주는 것처럼. 뒤통수를 더듬어 보았다. 모자는 그대로 있었다. 나는 별 불편없이 모자를 벗어서 머리를 만져보았다. 멋지고 오래된 내 머리. 너무 오랫동안 달고 다녔지. 지금은 약간 무른 과즙같고 꽤 아팠다. 그렇지만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가볍게 얻어맞은 정도였다. 모자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대로 여전히 쓸만한 머리였다. 어쨌거나 내년에도 쓸 수 있을 것이다.
20분이나 잠을 자다니. 곤하게 한참 잤군. 그동안 얼뜨기같이 일을 놓치고 8천 달러를 잃어버렸다 이거지. 뭐, 안될 게 있나? 20분이면 전함도 침몰시키고, 비행기라면 서너대도 격추시킬수있고, 사형도 두번은 집행할 수 있는데. 죽을 수도 있고, 결혼할 수도 있고, 해고를 당했다가 새로 취직할 수도 있고, 이를 뺄수도 있고 편도선을 떼낼 수도 있다. 20분이면 심지어 아침에 잠에서 벌떡 일어나거나 나이트클럽에서 물한잔 얻어 마실수도 있다. 20분이나 잠을 자다니. 긴 시간이다.
"훌륭한 이론입니다. 매리엇이 내 머리를 갈기고, 돈을 가져간 다음에 너무 미안해져서 자기 뇌수가 튀어나오도록 머리를 갈긴 거로군요. 먼저 돈을 수풀 밑에 묻은 다음에요."
“이거 전에 본 적 있소?”
“물론이죠. 지금 보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말은, 오늘 저녁, 지금보다 더 전에 말이오.”
머리에는 크기가 위스키잔만하고 챙은 일주일치 빨랫감도 다 쌀 수 있을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는 45도 정도로 비스듬하게 얹혀 있어서 챙의 가장자리가 어깨에 닿을 듯 내려왔다. 그래도 맵시있는 모자였다…. 그녀의 미소는 멋졌다. 잠을 푹 자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매력적인 얼굴, 누구라도 곧 좋아하게 될 얼굴이었다. 예쁘긴 하지만 같이 외출할 때마다 남자들이 덤벼들까 두려워 격투 태세를 갖춰야 할 정도로까지 예쁘지는 않은 얼굴.
“글쎄…” 그녀의 말은 밀폐된 공간의 연기처럼 허공에 맴돌았다.
“어떤 일에는 아니었죠. 다른 일에서는 믿었어요. 정도의 차가 있는 거지요.” 그녀는 말을 근사하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반쯤 냉소적이고, 그렇다고 너무 무정하지는 않게. …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게 보이는 여자를 나는 내 일생에서 네 명밖에 보지 못했다. 그녀가 그중 한명이었다. … 나는 그녀에게서 술잔을 받아들고 왼손을 바꿔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촉감이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따뜻하고 편안했다. 그녀는 내 손을 꽉 쥐었다. 생각보다 악력이 강했다. 그녀는 건강한 체격의 여자로 종이로 만든 꽃따위가 아니었다.
그(세컨드 플랜팅)가 코웃음을 치자 콧구멍이 확 넓어졌다. 쥐구멍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넓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가 갑작스레 움직였다. 나는 움직임을 보았다기보다 느꼈다. 암흑의 심연이 내 발밑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훨씬 더 깊었다. 나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에는 밑바닥이 없었다.
낮은 목소리가 웅얼웅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딸깍 끊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지금이야말로 떠날 시간, 멀리 사라질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문을 밀치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증거요?”
그(랜들 반장)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커피 좀 드시렵니까? 커피 한잔 들면 좀 인간다워질 텐데.”
“됐소.”
“난 좀 마셔야겠습니다.”
“나는 매끈하고 화려한 여자가 좋아요. 비정하고 죄를 잔뜩 짊어진 여자들 말이예요.”
“그런 여자들은 당신을 홀딱 벗겨먹을 거요.” 랜들은 무심하게 말했다.
“물론이죠.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내가 옷을 벗겠습니까? 그런데 이 수업 이름이 뭡니까?” 그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하루에 네 번 정도 웃기로 정해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폭발하기 직전 같았다.
“그럼 이제 제발 집에 가서 당신 일이나 신경 쓸 텐가?”
“그런 편지까지 챙겨두다니 정말 자상한 사람이었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눈을 부릅떴고 눈길이 한동안 내 머리 꼭대기에 머물렀다. 그러다 눈동자가 반나마 덮힐 만큼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그렇게 나를 10초쯤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오늘은 끔찍이 많이도 미소짓는군. 일주일 치를 다 써버렸겠어.
“저는 명령대로 합니다.” 헤밍웨이의 말에 서장은 그를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빗으로 싹싹 빗고 훑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왜 그한테 갔던가 의아해하며 돌아서 걸었다. 직감에 따라 행동하라. 직감에 따라 행동하고 허를 찔리는 거지. 잠시 후면 입에 직감을 잔뜩 쑤셔박은 채 깨어나게 될 걸. 눈을 감고 메뉴판을 찍지 않으면 커피 한 잔도 주문할 수 없다. 직감에 따라 행동하라니까.
84센트짜리 저녁 식사는 버려진 우편가방 같은 맛이 났다. 음식을 날라다 준 웨이터는 25센트만 주면 나를 때려 눕히고 75센트에 내 목을 따버리고, 세금 포함해서 1불50센트만 주면 콩크리트 통에 내 시체를 넣어 바다에 갖다 버릴 사람 같았다.
“안 돼요. 안된다고.” 그(레드)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부드럽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졌으며 냉정하고 천박한 젊은이의 본래 성격을 비단 손수건으로 억누르고 있는 셈이었다…. 레드는 보트를 잡아당기는 갈고리 장대로 그걸 던져서 꼭꼭 잡아당긴 뒤 그 끝을 엔진 커버 위에 있는 뭔가에 묶었다. 안개는 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적당하게 깔려 있었다. 축축한 공기는 사랑의 재만큼이나 차가웠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 건 아니예요. 25구경이라면요.” 구급차의 의사가 나가기 전에 말했다. “모든 건 총알이 내장 어디에 맞았느냐에 달려 있어요.”
“그 사람은 살아나는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무스 맬로이는 정말 원치 않았다. 그는 그날 밤에 죽었다.
“…이기든 지든 사건이 기각되든지 간에 누가 이 쇼에 대해서 가장 큰 대가를 지불하겠습니까? 사랑하는 방법은 현명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지나치게 사랑했던 한 늙은 남자죠.” “그건 감상적인 생각일 뿐이오.” 랜들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물론이죠. 내가 말해놓고도 그렇게 들립니다. 아마도 모든게 다 실수였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내 분홍벌레는 언제 여기까지 다시 올라온 겁니까?”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와 시청의 계단을 내려갔다. 서늘한 날이었고 하늘은 아주 맑았다. 아주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벨마가 간 곳만큼 멀리까지는 아니었다. <끝>